블로그 이미지
중앙일간지 기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출입처 덕에 문외한인 경제에도 관심을 쏟게 됨. 그래도 아직은 초짜
펜의팬

Notic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21,079total
  • 0today
  • 1yesterday

경제적 개인주의는 좋은 것일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효율적인 작용이 시장을 올바르게 서게 할 것이라 말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1. 가와카미 하지메가 1917년 발표한 ‘빈론곤’은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문명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하다.” 약 1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그리 바뀌지 않은 셈이다. 왜. 국가는 부유해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수의 사람이 대다수의 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맹자는 “훌륭한 임금은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주어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게 하며 풍년에는 내내 배부르게 먹게 하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 하다. 워킹 푸어, 비정규직 노동자, 크리넥스 인간, 일용직, 88만원 세대…. 오히려 지난 수십 년 간 진행된 ‘세계화’로 자본은 더욱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왔고, 국가는 국내총생산과 경제발전으로 이를 면피했다. 효율적인 분배는커녕 부의 집중만 더해 갔다. 초국적 기업은 독과점으로 나아간다. 동일선 상의 공정한 경쟁은 찾기 힘들다. 이게 시장의 효율적 작동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은 손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2. 이기심의 호소. 현대 경제학을 뒷받침하는 말이다. 우리는 개인의 자선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한다. 나를 위한 것이 곧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부자들은 사치를 즐긴다. 수요가 있는 곳엔 공급이 있기 마련. 이들 수요를 잡기 위해 사회생산력의 일부가 사치품 제조로 넘어가고 생활필수품 제조에 들어가는 생산력은 줄어든다. 왜. 간단하다. 빈곤층은 소비력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빈곤층은 ‘비 노동자’가 아니라 ‘비 소비자’로서 우선시 된다. 개인적 이기심에 비춰봤을 때 소비력이 없는 계층이 필요한 물품을 만들려는 이는 드물다. 아니, 없을 거다. 그러므로 이기심에 호소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논리는 현재 사회의 헤게모니를 공교히 하는데 사용된다. 돈이 있는 곳에 모든 게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비인간적인 원칙. 수십 년 간 우리는 이 비인간적인 원칙을 절대신처럼 받들어왔다.

3. 가와카미 하지메는 가난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가난은 부자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경제상의 불평등’이다. 두 번째는 국가나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경제상의 의존’이다. 마지막은 생활필수품조차 부족해 생활이 아닌 생존 투쟁을 해야 하는 ‘경제상의 결핍’이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가난을 물리쳐야 한다. 빈곤선에 있는, 그리고 빈곤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빈곤선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가와사키 하지메는 부자들이 사치를 줄이면 된다고 하지만 이는 너무 도덕적이다. 결국 국가의 몫이다.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왜 이렇게 사냐고 묻기 전에 어떻게 가난하게 됐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한국에만 수백 만 명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4. 흔한 거짓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부자만큼 고생이 많은 사람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그럼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건 쉽나, 가난한 사람은 고생을 하지 않나. 두 질문 모두 성립이 안 된다. 우선, 가난한 사람이 천국(행복한 곳)에 간다는 말은 현실을 잊기 위한 ‘뽕’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을 간다면 누가 가난을 마다하겠나. 가당치 않다. 가난한 사람이 고생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생활이 아닌 생존을 순간순간 넘겨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앞에서 부자들의 고생을 말하는 건 오히려 사치다.

5. 그럼에도 왜. 애덤 스미스는 1759년에 발표한 ‘도덕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체의 안이와 정신의 평화라는 점에서 보면 여러 계급 사람달은 거의 동일한 평균적인 수준에 있다. 예컨대 대로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거지가 갖고 있는 안심은 여러 왕들이 바라는 것이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분에 넘치게 부유한 것이 불행한 것이라고 해서 과도하게 가난한 것이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자가 더 고생한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을 뽕 맞추고 △부와 고생이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연결시켜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하며 △빈부격차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약간의 수긍을 가게 한다. 쉣! 똥같은 소리에 맹자는 이렇게 일침했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6.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

 

 

posted by 펜의팬 펜의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코가 안경을 걸치기 위해 진화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미치광이라는 비판을 받을게 틀림없다. 사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안경이라는 사물은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행해지는 객체지, 스스로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객전도다.

 

사실 안경만이 아니다. 모든 사물이 그렇다. 발이 구두에 맞추는 게 아니라 구두가 발에 적응하는 게 옳다. 멋진 옷에 몸을 꿰맞추는 게 아니라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입고 쓰고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이다. 참으로 간단한 논리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현대사회에서 이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더 나아 보이고 싶다’ ‘다 나를 위한 것이다’는 욕망이 비논리성을 감싸기 때문에 주체에서 객체로 변한 이 상황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은 빠르게 지나치는 컨베이어 벨트에 맞춰 나사를 조이는 일을 반복한다. 여기서 주인은 누구일까. 컨베이어 벨트에 맞춰 단순노동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쉴 새 없이 찰리 채플린을 지나치는 컨베이어 벨트일까. 질문의 답은 명확하다. 컨베이어 벨트를 움직이게끔 하는 것도 사람이니 주인은 사람이다. 단지 나사를 조이는 찰리 채플린은 그의 노동력을 그 시간동안에만 자본에 팔고 있을 뿐이다.

 

그럼 ‘몸짱’ 열풍은 어떻게 봐야하나. TV 속 어딜 봐도 하나같이 날씬한 사람들뿐이다. 심지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조차도 깡마른 체형을 갖고 있다. 과거 뚱뚱함이 부(富)의 상징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게으름의 표상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다이어트는 신년 계획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런데 날씬하고자 하는 이 생각이 정말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일까. 아니면 남이 뚱뚱함은 게으른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고자 하는 것일까.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비단 여성만이 아니다. 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타자에 의해 제작된 존재일 가능성이 짙다. 여기서 타자는 권력을 갖고 있는 타자다. 이전 시대의 권력자가 소학이나 삼강행실도를 일종의 전 사회적인 규율로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을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권력자는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그를 복제할 따름이다.

 

이들 논리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되뇐다. 날씬한 몸을 유지하는 것은 건강에 좋고 사람들이 당신을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자극한다. 권력자는 욕망의 가면을 쓰고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행복유예론’은 벌써 십 년 간 유예되고 있다. 끝이 없다. 그동안 한국은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는데 말이다. 서구사회가 복지국가를 이룬 시점은 현재 한국의 국내총생산에 훨씬 못 미쳤을 때임을 상기해 본다면 행복유예론이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이어트를 하다가 거식증에 걸려 고생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종종 보도되는 것을 보면 몸짱 열풍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쪽에서는 못 먹어서 굶어죽고 한 쪽에서는 안 먹으려고 하다가 죽는 상황에서 정작 살을 찌우는 것은 몸짱 욕망을 앞세운 권력자다.

 

그의 이름은 자본이다. 그는 말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크게. 그래서 지친 당신에게 필요한 건 ‘게으를 권리’다.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위해 일하고, 몸을 사회에 내맡기는 게 아니라 개인 스스로 돌보는 그런 여유 말이다. 아마 그렇지 않다면 코는 안경을 쓰기 위해 진화했다는 생물학적 농담을 결코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지 모른다. 더 이상 당신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펜의팬 펜의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여기 남자가 있다. 달에서 청정에너지원인 ‘헬륨 3’을 채굴해 지구로 보내는 게 그의 직업이다. 남자는 2주 후면 3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딸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그립다. 그의 이름은 샘 벨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툭하면 고장 나는 채굴기계를 손보려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다. 의식을 잃는다.

샘 벨이 눈을 떴다. 사고가 난 현장이 아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달 기지의 의무실이다. 그의 조수격인 로봇 ‘거티’가 말한다. 사고가 있었어요. 당신은 의식을 잃었고요.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치면 문제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사고 현장에 간 샘 벨은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샘 벨을 보게 된다. 샘 벨은 샘 벨인데, 두 사람 모두 샘 벨이다 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도 샘 벨이 아닌 게 돼버린 셈.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읊조림처럼 말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샘 벨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정체성 혼란. 그리고 어제 영상편지를 보낸 아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영상 속 어린 딸은 다 커버린 아가씨가 돼버린 현실. 사람은 기억(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에 따른다면, 샘 벨은 두 번째 죽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영화 ‘더 문’은 인간복제기술과 자본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노동계급을 묘하게 엮었다. 자본에겐 달에서 조작된 기억에 의지하며 외로이 일하다가 죽어가는 ‘복제인간’은 하나의 물건일 따름이다. 그래서 자본은 샘 벨이 사고가 났을 때 깨울 수많은 샘 벨을 저장해 둔다. 3년 일한 샘 벨을 가족 곁으로 보내준다면서 우주장(葬)을 치른다. ‘사랑’ 기지에는 정작 사랑이 없다. 샘 벨은 무한하고 자본은 위대하다.

공상과학영화다. 하지만 현실과 너무도 닮았다. 공간을 공사현장이 아닌 달 기지로, 시간을 현재가 아닌 미래로 설정해놔 그렇지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어제 했던 일을 오늘 하고 내일도 한다. 내일 모레도 할 것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샘 벨과 다르지 않다. ‘가족에게 가고 싶다’는 조작된 기억 대신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바람이 고된 노동을 견디게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샘 벨이 겪은 외로움의 끝은 우주 쓰레기. 내일의 바람은 오늘에 대한 탄식, 한숨, 한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난의 굴레다. 그 사이 자본은 살을 찌운다.

영화는 사랑에서 탈출한 샘 벨이 자본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샘 벨이 채굴하는 기계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는 순간이다. 허나 현실은 냉랭하다. 한국 사회 임금 노동자의 과반수가 비정규직이다. 적하효과는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정부는 ‘노동유연성’만을 강조한다. 야만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전태일 열사의 유언이 30여 년이 지나도 유효한 사회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더욱 애잔하다. 여기 사람이 산다.

posted by 펜의팬 펜의팬

댓글을 달아 주세요